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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박래욱(朴來昱) 씨는 한국전쟁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아버지가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까닭에 어머니까지 북한 인민군에 희생된 것이다. 졸지에 12살 '소년가장'이 되어 버린 그는 두 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을 등에 업고는 '젖 동냥'을 다녔다고 회고한다. 이 때문인지 그에게 6ㆍ25는 단순히 동족상잔의 비극일 수가 없으며, 현대사를 소위 '진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기엔 인민군에 의한 비극이 그에겐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감초당 한약방을 경영하는 박씨는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무려 55년 동안 쓴 일기장 98권 일체를 모두 기증했다. 이 일기는 1997년에는 생존한 개인이 가장 오랫동안 쓴 일기라 해서 한국기네스인증서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때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일기를 빼놓지 않고 쓰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매일 아침 한약방에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일기 쓰기라고 한다. 민속박물관은 2년 전 박씨에게는 또다른 생명과도 같은 일기장과 그의 손때가 묻는 생활문물 일체를 기증받으면서 이를 특별전시회 등을 통해 공개하기로 약속했다. 민속박물관 제3기증실에서 다음달 1일 개막해 11월3일까지 계속될 '내 삶의 감초, 55년간의 일기' 특별전은 바로 그때의 약속을 실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리는 1950년 이후에 줄곧 써 내려온 일기장과 각종 관련 자료 250여 점을 한데 모아 개인사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하지만 개인은 사회와 떨어질 수는 없는 법. 이에 이번 기증전은 박래욱이란 개인사를 한국 현대사라는 전체 프리즘의 구도 아래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박씨는 고교 졸업 후 농사꾼과 제사(製絲) 공장 기사, 그리고 화장품 외판원을 거쳐 1971년에 한약방을 열어 오늘에 이른다. 2만쪽, 1천만자에 이르는 일기는 기네스북 등재를 계기로 워낙 외부에 많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탈초(脫草. 인쇄체 텍스트로 바꾸기)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담은 내용은 훨씬 다채롭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에 따라 일기 풀어쓰기 작업을 진행하는 박물관 학예직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학창시절 그의 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오늘은 어떤 과목을 공부했다"는 것인데, 이를 이해하려고 당시 학제와 교과목까지 대조하게 된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파노라마인 그의 일기를 보면 전쟁, 부정선거,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 올림픽과 같은 굵직한 사건 외에도 학교, 공장, 외판, 한약방과 같은 개인적 일들, 헬로, 오케이, 마카오신사, 양공주, 사바사바와 같은 시대별 유행어, '보봐리 부인', '임자없는 나룻배', '돌아오지 않은 해병'과 같은 추억의 영화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무허가로 한약을 팔다 시험에 합격해 정식 한약사가 된 후 부모 묘소에 가서 고하는 장면은 읽는 이의 가슴까지 저리게 한다. 일기 외에도 1961년에 쓰기 시작한 금전출납부(전 10권), 1971년 한약방을 개업하면서 쓰기 시작한 처방전(16권) 또한 그의 철저한 기록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금전출납부를 통해 일기에 기록된 금액을 확인하게 되고, 처방전을 보면 누가 왜 한약을 사러 왔는지가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복제물 형태로 관람객들이 박래욱 일기를 직접 볼 수 있게끔 하는 체험공간도 따로 마련했다.